본인작품에 나타난 다원주의적 경향

본인작품에 나타난 다원주의적 경향
Arthur C. Danto의 AFTER THE END OF ART를 중심으로



1. 들어가는 글

2. 본론

1)본인작품의 개요
A. 작품의 내용과 의미
B. 의미구현과 효과
(1). 동양적 사고와 서구의 매체
(2). 상충과 충돌 그리고 모호함과 산재함
2) 아서 단토의 미술종말론의 개요

3. 결론





1. 들어가는 글

본 연구는 본인작품에 나타난 다원주의적 경향에 대한 연구이다.
미술의 종말 이후의 시기이며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시기라고 정의하는 단토의 종말론은 오늘날의 예술은 내용과 의미를 가지고 이어야 한다는 것과 어떤 것에 관한 것(aboutness)이 예술이 되기 위해서는 의미를 구현 하고 있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러한 다원주의적 경향이 본인의 작업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 살펴보기 위하여
본인은 본인의 작품에 사용한 이미지와 주제 그리고 양식의 이용에 대해 논의를 진행하기로 한다. 먼저 ‘퓨전동양화’가 키워드인 본인작품에 나타나는 내용과 의미를 알아보고
동양적 사고와 서구의 매체, 모호함과 산재함 그리고 상충과 충돌로 말해지는 본인작품의 의미의 구현과 효과를 설명하여 작품의 개요를 논하고자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서 단토의 미술종말론의 개요를 통하여 본인작품과 다원주의의 관계를 추론 해 보기로 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본인작품에 존재하는 다원주의적 경향을 정리하여 본 연구의 결론으로 삼고자 한다.



2. 본론

1)본인작품의 개요

‘퓨전동양화’가 키워드인 본인 작업의 특징은 동양화의 근간을 이루는 詩, 書, 畵의
개념과 書畵一體의 개념을 지필묵과 형광안료 그리고 미디어를 통해 구현하는 것이다.
본인작업의 분명한 특성을 이루는 동서고금의 문화와 예술, 일상적 삶에 대한 시적 체험에서 비롯된 일상의 습관적인 詩作은 그림과 글씨의 조합으로 나타난다.
여기에는 긴장감이 개입된 충돌과 화해가 존재하며 ‘상충의 미학’을 기반으로 하며
‘텍스트와 이미지가 상충한다. 또한 먹과 현대의 안료가 상충한다.
종이와 미디어 역시 충돌한다. 이 다층적인 충돌은 작업 전면의 적절한 장치와 구조를
통해 해결되고 화해함으로써 홍지윤의 퓨전동양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동양화를 연구하는 본인의 작업에 개입된 삶에 대한 끊임없는 애착은 기본적으로
동양적 사유체계에 기점을 두며 이제 더 이상 동서의 구별이 존재하지 않는
다원화된 현재의 시점에 있어서 동서양의 혼합된 사고체계 안에 자리한다.
이것으로 본인의 동양화는 새로운 존재방식을 갖는다.

A. 작품의 내용과 의미

작품의 내용

1. 동양의 사유 체계는 우주와 자연과 삶에 대한 해석이다.
그리고 그 기반에는 "자유로움"이 있다. 이는 하나의 연속체인 우주 안에서 자연과 창조의 기본 원리이다. 따라서 자연의 이치에 대한 관심은 표현의 자유로움에 대한 단초가 된다.
나의 작업은 자유로움에 대한 정신적이고 또한 물리적인 사유의 공간적 재현이다.

2. 동양에서 말하는 '변화(變化)'란 서양의 '변화(change)'와는 다르다. 변(變)이라는 말이 물리적인 현상만을 말한다면 화(化)에는 근원의 변화 또는 아이덴티티의 변화라는 개념이 내재되어 있다. 즉 근원적 변화로 아이덴티티를 창츨하는 행위적 요소가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고인古人의 가능성을 몸에 익히면서도 그것이 아닌 아이덴티티의 근원적 변화가 일어나는 유기적 생성 그리고 고법古法에 구애됨 없이 자기 자신의 인식을 표현하는
개념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石濤 畵論>에서는 이와 함께 고 古 /경 經/권 權의 개념을 화'化'와의 연장선상에서 다루는데 '경'과 '권'이란 곧 영원한 변화를 나타내는 말로 예술 행위에 있어서 결여될 수 없는 두 개의 축,즉 원칙과 상황의 적절한 넘나듦에 대한 의미로 경과 권에 대한 논리는 법'法'과 화'化'의 의미로 대체된다.

3.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따뜻한 만남: 시(詩)+수묵(水墨)+영상 "
나의 그림에는 화려한 슬픔과 철학적 낭만이 있다. 나의 작업에서 시는 그림이 되고 또한 그림은 시가 된다. 생각을 해 보면, 그림은 또는 시는 우연히 왔다가 우연히 가는 삶에서 만난 우연한 어떤 때를 관찰하고 기록으로 남기는 일인 것도 같다.
그렇게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느끼고 깨닫고 그리고 나서 시를 짓고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리고 가벼운 농담을 하듯 이야기를 한다." 나의 작업은 주로 자연에 대한 자유로운 생각들과 일상의 삶에서 이루어지는 감정의 흐름을 글과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에 있으며 紙, 筆, 墨과 詩,書,畵 그리고 서화동원(書畵同源)의 개념을 기반으로 한다.
언제나 소통의 매개는 언어와 이미지이며 예술은 문학적인 네러티브에 기초한다.

4. 홍지윤의 퓨전동양화 : “홍지윤의 사유(思惟) – 움직이는 水墨그림과 詩
동양화는 시(詩)이다.
본인작업에 있어서 소통의 매개는 언어와 이미지이며 문학적인 네러티브에 기초한다.
작업은 자연과 일상의 삶에서 이루어지는 자유로운 생각으로 詩를 짓고 글씨를 쓰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이러한 것이 水墨그림이 되고 때로 컴퓨터에 옮겨져서
수묵동양화의 전통과 영상매체의 현대성, 아날로그와 디지털이 결합되어 수묵영상이 된다.
이는 紙, 筆, 墨과 詩, 書, 畫 그리고 서화동원(書畵同源)의 개념으로 전개된다.
수묵은 물과 먹에 의한 단순함과 자유로움, 자연스러운 다양함을 특징이며 정신이다. “홍지윤의 사유 - 움직이는 수묵그림과 시”라는 작업의 명제는 여기서 비롯되어 이를 담아내고자 한다.
홍지윤의 퓨전동양화는 이와 같은 방식으로 동양화의 전통과 수묵화의 기법 그리고 형광안료를 사용하는 등 동양의 전통적인 정서와 현대의 정서와의 만남을 통해
회화, 그래픽이미지, 영상, 설치 등 현대의 기술과 이미지로 젊고 생기발랄하게 해석한다. 홍지윤의 퓨전동양화는 동양화가 동양화의 전통과 현대 산업사회의 다양한 문화가 만나 만들어지는 새로운 동양화의 존재 방식을 제안하여 현재진행형의 동양화를 추구한다.

작품의 의미

1. ......수묵과 그래픽영상이란 도대체 어떤 관계를 지닐 수 있는 것인가. 그것이 가능한 것인가 하는 물음에 앞서 그의 실험은 경쾌한 진행을 보여주고 이와 같은 의문을 부단히 불식시키는 매력이 있다. "나의 수묵 애니매이션이 아날로그와 디지털이 따뜻하게 손을 잡은 모습"이란 작가의 말처럼 어색함이 보이지 않는다. ...... 그가 하고 있는 기본은 전통적인 수묵이다. 단지 이를 다시 영상으로 프로그래밍화 하였다는 과정이 있을 뿐이다. 작가는 "전통적인 동양화가 지금에 있어서 어떠한 방법으로 재해석 될 수 있는가에 대한 하나의 실험"이라고 자신의 실험에 대한 정의를 이끌어 낸다...(중략)..... 홍지윤 의 수묵과 영상매체를 결합시켰다는 것은 일견 기발한 착상이 될 수 있고 수묵화의 존재방식에 대한 나름의 제안이 되기에 충분하다고 본다_
오 광수, 월간아트인컬쳐 2005 4월호-FOCUS 한국화의 다양한 매체실험

2. .........문인화적 모색은 홍지윤의 작업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작가는 그만의 조형적 시각과 다양한 재료의 혼용으로 시, 서, 화 일치를 시도한다. 시, 서, 화와 지필묵의 전통이 등장하고 미디어(영상/그래픽)를 통해때때로 재구성되기도 한다. 이를 테면 부분적으로 칼리그래프(서예)가 타이포그라프의 형식으로 보여지기도 하는 것이다. 가벼움과 무거움 사이사이에서 글씨와 그림이 흘러간다. 여기로 그린 그림처럼 자유로운 의식을 표현하기 위해서 서예나 시의 요소가 홍지윤의 회화에서는 필요하다. 이는 전통에 대한 재해석이라거나 새로운 어떤 것에 대한 비약적 논리가 아니라 작가가 할 수 있는 익숙하고 즐거운 작업의 특색이고 특징이라고 홍지윤은 말한다. 그림을 그리고 시를 짓는 행위를 통해 문인적 취미와 작가적 의식을 동시에 드러내고 있다. 그의 그림에 보이는 화려한 형광 색은전통적인 오방색 이라기보다는 텔레비전 화면조절용 컬러배열처럼 보이며 전통화화의 시간적 측면은 영상적업을 통해 친밀하게보여 지고 있다........
임종은, 2007 월간미술 6월호 Special feature - 감각적 감수성으로 무장한 신세대 작가
(전통을 넘어선 새로움 움직임)

3. .........홍지윤의 작업은 시상詩想 에서 출발한다. 그의 글은 순수한 외면적 사물, 인간활동에 대한 과장된 묘사도 아니며 내면적 영혼, 사변, 철학에 대한 추구도 아니다. 현실적 인간세계에 대한 긍정적이고 낭만적인 인식과 느낌이고 동경과 집착이다. 여기에는 일종의 풍성하고 젊은 정열과 상상이 스며들어 있다. 설사 낙심, 우울, 슬픔에 대해 묘사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 속에는 역시 젊음, 자유, 기쁨의 기운이 약동하고 있다. 그 기운은 글과, 글을 담은 글씨와, 글씨를 벗한 그림을 통해 작품에 고스란히 반영된다. 그렇게 작품은 운율韻律을 담는다…………홍지윤의 작업은 이렇듯 텍스트와 이미지가 상충한다. 또한 먹과 현대의 안료가 상충한다. 종이와 미디어 역시 충돌한다. 이 다층적인 충돌은 작업 전면의 적절한 장치와 구조를 통해 해결되고 화해함으로써 홍지윤의 퓨전동양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시대의 문화적 선구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성윤진, 문화일보 갤러리 큐레이터 2007 음유낭만환상 개인전 서문발췌

4. ............홍지윤, 삶과 사랑을 소요하다.
전통의 방법을 막연히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방법이기에 고수하고 있는 먹과 종이. 그런 그를 두고 화선지 위에 먹과 붓으로 시를 쓰고 그림을 그려 넣었으니 굳이 옛문헌이나 기록에 의존한다면 현대판 문인화라고 끼워맞출 수도 있을 것이다. 먹으로 그린 후 미디어와 라이트박스 작업을 통해 보여주고 있으니 퓨전 동양화라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굳이 그렇게만 단정지어 부르고 싶지는 않다.
시를 짓고, 그림으로 노래하는 홍지윤은 문인보단 이 시대의 예술쟁이로, 퓨전 동양화보단 포스트 동양화로 더 질펀하고 더 폭넓게 제대로 놀아주길 희망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마치 장자의 우화에서 나온 이야기 소요유消遙遊와 같다. 장자가 말한 유희는 단순한 의미를 너머 그 속에서 드러나는 자유스런 마음을 승화시켜 얻어지는 정신의 해방을 뜻한다. 이런 유희는 자발적이며 신명나는 유희이다. 내가 홍지윤의 그림을 보며 '한 판 논다.'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이다.
그러니 어쩌면 홍지윤은 이미 삶과 사랑을 치열함을 넘어서 소요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친다.
김최은영, 더 갤러리 큐레이터 2008 인생은 아름다워 개인전 서문발췌




B. 의미구현과 효과
(1) . 동양적 사고와 서구의 매체

본인의 작업의 근간을 이루는 동양적 사고의 체계에는 시공간적 개념이 개입된다.
이러한 경향은 2005년 개인전 "사계(四季)" (아트포럼뉴게이트, 서울), 2006년 독일전
"친구 넷, 동양에서 독일로“ (뮌헨문화부 초청, Munich city hall gallery 독일), 2007년 개인전 “음유 낭만 환상” (문화일보갤러리,서울), 2008년 개인전 “인생은 아름다워”등 최근 전시의 제목에서도 알 수 있다. 이는 또한 시와 수묵그림으로 엮은 2003년 출간 한 ‘화선지위의 시간’이라는 책의 제목에서도 나타난다. 본인은 이러한 시공간적 개념이 개입된 사고체계를 일상의 詩적 체험을 통해 지필묵을 사용하여 그림과 글씨로 기록하고 디지털화하여 그래픽, 라이트 박스, 영상 등의 서구의 매체로 표현한다.
다음의 내용은 2005년 개인전 "사계(四季)" 와 2007년 개인전 “음유, 낭만, 환상-원효로와 청파동에서 낭만적인 시를 짓고 환상적인 그림을 그리다. ” 의 작업노트 일부, 그리고 미디어 아트 채널 엘리스 온 (www.Aliceon.net / 홍지윤, 새로운 동양화 존재방식을 제안한다_interview 2008.05.14 Aliceon0804 interview q&a sheet _ 홍지윤)과의 인터뷰 글을 발췌한 내용이다. 이를 통해 시공간적 개념을 바탕으로 하는 본인의 동양적 사고 체계가 어떠한 형식으로 서구의 매체로 표현되어지는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1.
2005 사계“四季”
홍지윤의 思惟 - 움직이는 수묵그림과 시


....네 가지 계절에 대한 사유에는 화려한 슬픔과 철학적 낭만이 있습니다.
계절의 변화에 대한 일상의 감흥을 표현한 “사계(四季)”는
시가 그림이 되고 그림이 시가 됩니다.
봄은 만물이 피어나는“화려(華麗)”로, 여름은 모든 감각기관이 열려져 만개한 상태 그대로의 “열정(熱情)”으로, 그리고 가을은 사라지기 직전의 것들에 대한 “우수(憂愁)”로, 겨울은 잠들어버린 모든 것에 대한“고독(孤獨)”으로 나타납니다.
생각을 해 보면, 그림은 또는 시는 우연히 왔다가 우연히 가는 삶에서 만난
우연한 어떤 때 -계절을 관찰하고 기록으로 남기는 일인 것도 같습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느끼고 깨닫고 그리고 나서 시를 짓고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리고 가벼운 농담을 하듯 네 계절에 대한 이야기를 해 봅니다....

2.
2007 홍지윤의 퓨전동양화
“음유, 낭만, 환상 - 원효로와 청파동에서 낭만적인 시를 짓고 환상적인 그림을 그리다. ”

.....그것이 지나간 것에 대한 환상(喚想, illusion)이든, 지금 눈앞에 보이는 환상(幻像, phantom)이든, 나도 모르는 새에 일어나는 환상(幻想, fantasy)이든, 실체도 없이 허망하고 덧없는 내일의 환상(幻相, vision)이든....

3.
Aliceon : 안녕하세요.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지난 3월에 진행되었던 11회 개인전에 이르기까지 홍지윤 작가는 ‘퓨전 동양화’ 작가로 알려져 왔습니다. 본인을 설명하는 키워드가 된 ‘퓨전 동양화’에 관해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제가 추구하는 퓨전동양화는 시와 글씨가 기반이 되는 수묵화를 탐구하여 동양의 전통적인 정서를 현대의 기술과 이미지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동양화와 디지털의 만남을 기점으로 하여 동양화와 다른 문화가 만나 만들어지는 새로운 동양화의 존재방식을 제안하고자 합니다. 이러한 제 작업은 현재진행형의 동양화를 추구하며 이는 동시대 미술을 이야기 합니다. 제 스스로의 작업이 지금의 삶을 사는 사람들의 마음에 편안하게 다가가서 함께 나누고 서로를 즐겁게 하는 것으로 기억되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Aliceon : (위 질문에 이어서) 개인 홈페이지에서 “동양화와 다른 문화가 만나 만들어지는 새로운 동양화의 존재방식을 제안한다”라고 언급을 하셨는데, 동양화의 새로운 존재 방식으로서의 영상 매체와의 결합은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요?

동양의 사유 체계는 우주와 자연과 삶에 대한 해석입니다. 그리고 그 기반에는 "자유로움"이 있습니다. 이는 하나의 연속체인 우주 안에서 자연과 창조의 기본 원리이기도 하죠. 따라서 자연의 이치에 대한 관심은 표현의 자유로움에 대한 단초가 됩니다. 제 작업은 자유로움에 대한 정신적이고 또한 물리적인 사유의 공간적 재현입니다. 동양화의 수묵과 영상과의 만남은 이러한 수묵 동양화의 전통과 영상매체의 결합이며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결합하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즉 제 작업은 시와 글씨가 기반이 되는 수묵화를 탐구하여 동양의 전통적인 정서를 현대의 기술과 이미지로 해석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Aliceon : 새로운 기술을 활용한 다양한 작업들을 진행하시다 보면, 기존 동양화 작업들과 다른 새로운 고민이 발생할 수도 있다고 보여집니다. 혹시 그러한 부분이 있으셨다면 어떠한 것들인가요?

동양화는 기본적으로 지필묵을 재료로 한다는 양식적 특징의 의미가 있습니다.
또한 문인화의 개념에는 문학에서 말해져온 보여지는 것 이외의 것을 그린다는
상외지상(象外之象, 형상 밖의 표상 - 언제나 생생하게 존재하고 있는 허의 상은 감상하는 독자의 마음속에서는 드러나게 된다. 독자들의 상상력을 고조시켜 시에 묘사된 것보다 훨씬 광대하고 풍부하며 생동적인 그림을 만들어 내도록 하는 것 이것이 상외지상(上外之象)이라고 하였다) 이라는 말에 의미를 둡니다.
이는 앞서 말씀드린 대로 이러한 동양화가 단지 재료로써 만의 문제가 아니라 제게는 정신성을 요구하는 작업에 대한 태도의 문제로 받아들여져 왔습니다.
때문에 처음에 이러한 동양화의 특성이 강한 제 작품을 가지고 기술적 변형을 한다고 생각했을 때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매체로써 동양화(지필묵)과 사진, 그래픽, 영상은 정 반대의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작품으로써의 설득력과 객관성을 갖기 위해서는 늘 둘의 성격을 한 선상위에서 이해하고 비교, 검토, 검증하는 과정이 필요했습니다.
내적이미지와 시각이미지, 무거움과 가벼움, 비움과 욕심, 수렴과 발산, 느림과 빠름,
종적사고와 횡적 사고, 모호함과 정확함, 동양과 서양, 동양화와 현대미술, 같은 것들이
그것입니다. 이러한 작업의 과정은 이제는 제게 있어서 삶을 유추하는 방법이 되었습니다. 그러한 고민의 문제들은 작가로써 뿐만이 아니라 삶을 사는 한 사람으로써 나 자신에 믿음위에서 해결되어왔습니다. 따라서 그러한 고민들이 단지작업을 위한 것뿐만이 아니라 나를 찾아가는 길에 길잡이가 되어 주고 있다는 점에서 고마운 마음입니다.

Aliceon : 예전 한 매체(2008 아트프라이스 1월호 - Artist Forum)와의 인터뷰에서 ‘작품과 작가의 삶이 일치하는가?’ 라는 질문에, ‘삶과 일치 한다. 삶을 詩로 적고 그것을 작품화 하는 것이 내 작업의 내용이기 때문이다’라고 답변을 하셨던 것이 기억납니다. 삶 속에서 느껴지는 감성을 작품으로 표현하는 데에 있어, 영상 매체가 지닌 특성이 있다면 어떠한 것인가요?

저는 오래전부터 그날의 삶을 하루하루 짧은 일기나 혹은 단상으로 기록하였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감성을 통해 정리되거나 혹은 그대로 풀어져서 한편, 한편의 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시어들을 정리하고 바라보면서 시가 가지게 되는 자체의 운율과 글씨자체가 가지고 있는 조형성에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글과 글씨들이 이렇게 저렇게 모았다가 늘어놓았다가 하며 또 다른 형태를 상상합니다. 이것들은 다시 이미지가 되어 편집프로그램 안에서 하나로 연결됩니다.
여기에서 '시간성‘이라는 개념을 빠뜨릴 수 없는데 이는 또한 동양화의 지필묵이 가지는 매체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다양한 농담을 담은 먹물은 단지 눈으로 보기에는 검은 먹물로만 보입니다. 이것이 시간을 거치면서 물이 증발하고 남은 후 각기 다른 농담으로 화선지위에서 본 모습을 보여주게 됩니다. 제게 있어서 시간을 지나면서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변해 원래의 색을 보여주는 수묵의 특성은 삶의 과정과 닮아있다고 여겨졌고 특별히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수묵그림이 컴퓨터 프로그램 안에서 편집되기도 하고 연결되기도 하며 변화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모습도 한 맥락위에서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수묵작업의 과정과 삶의 과정의 문제 그리고 수묵작업을 컴퓨터를 통해 매체화하는 데에 있어서 당연히 존재하는 시간성은 최근 이야기 하고 있는 제 감수성에 대한 ’기록‘의 문제와 직접적인 연결고리를 가지기도 합니다.
감성을 시간성위에서 시각화 하는 데에 있어서 영상매체는 제게 있어서 수묵작업과 동일시될 수 있다는 점에 있어서 흥미로웠고 작업의 경쾌한 진행에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이는 작업의 특징을 말 할 때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하며 제 작업에 있어서 영상 매체가 갖는 특성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Aliceon : 홍지윤 작가의 작업을 보면, 한편의 영상 편지를 보는 듯 합니다. 일전의 언급을 보면, '나에게 움직이는 수묵그림-수묵영상은 시간의 흐름을 동양적으로 시각화하기 위한 수단이다'라고 하셨는데, '시간 흐름의 동양적 시각화'란 어떠한 의미인가요?

위의 답변과 연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작가라면 누구나 그러하겠지만 저는 시간이나 계절의 변화 또는 세월이지나면서 변화되어가는 사람들의 겉모습과 속마음, 그것들과 나와의 관계를 예민하게 느끼는 것 같습니다.
언제부턴가 의식하지 않는 사이에 어쩌면 제 작업이 이러한 부분에 가까워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천성이 재빠르지 않고 단번에 무엇을 하기보다는 시간을 두고 일을 하고 그림을 그리고 삶을 살아가는 제 심성은 심사숙고하게 느린 속도로 그려질 수밖에 없는 수묵화의 재료적 특성과 닮아있습니다. 이제는 원래의 내가 그런 것이었는지 동양화를 그려서 그렇게 된 것인지 단정할 수 없겠지만요.
2003년 ‘화선지위의 시간’이라는 책을 만들었습니다.
이는 본격적으로 수묵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 1997경쯤부터 써온 편지나 일기 시 들을 엮어서 간간히 그려온 수묵드로잉들과 함께 엮어 만든 책입니다. 책의 제목을 지을 무렵 고심 끝에 책의 내용에 들어있는 시의 제목들을 죽 늘어놓고 보니 결국 지나가는 시간위에서 일어났던 또는 겪었던 감정들을 적어 놓았던 것이었습니다. 책을 출간한 이후 그러한 면에서의 ‘시간’에 대해 좀 더 깊이 생각할 기회가 많아졌고 본격적으로 수묵그림들과 시들을 영상에 담아보기로 하고 작업한 수묵영상 ‘가을날 저녁에’(2003)이 지금까지 수묵영상작업으로 이어져 오게 되었습니다. 영상작업을 진행하면서 수묵의 특성과 그것을 닮은 제 감성을 효과적으로 표현하려면 빨리 움직이는 세태나 여타의 영상작업의 속도보다 훨씬 느린 쪽을 선택하는 것이 더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시간성을 가진 영상작업의 디테일에 있어서 느린 디졸브로 이어지는 편집방식에서 느림의 정도를 조절하면서 느림 안에서 발생되는 빠르기와 또 다른 느림에 대한 생각들도 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생각들을 정리하며 영상작업을 진행하면서 ‘느림’으로 대체되는 동양적 사고와 동양화 내 삶의 방법을 수묵영상작업에서 다시금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시간 흐름의 동양적 시각화' 라고 표현 해 본 것입니다.

Aliceon : 2005년작 <사계>와 같은 작품을 보면, 작가의 삶을 통해 느껴지는 감성이 ‘영상, 그래픽, 사진, 수묵화’ 등의 다양한 표현 방법과 압축된 ‘시(詩)’로 드러나는 듯 합니다. 이러한 작업들은 문인화에서 보여졌던 ‘시(詩) ․ 서(書) ․ 화(畵)’를 영상 속에서 풀어내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이에 관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제 작업에서 시는 그림이 되고 또한 그림은 시가 됩니다. 생각을 해 보면, 그림은 또는 시는 우연히 왔다가 우연히 가는 삶에서 만난 우연한 어떤 때를 관찰하고 기록으로 남기는 일인 것도 같습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느끼고 깨닫고 그리고 나서 시를 짓고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리고 가벼운 농담을 하듯 이야기를 합니다." 나의 작업은 주로 자연에 대한 자유로운 생각들과 일상의 삶에서 이루어지는 감정의 흐름을 글과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에 있으며 紙, 筆, 墨과 詩,書,畵 그리고 서화동원(書畵同源)의 개념을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언제나 소통의 매개는 언어와 이미지이며 예술은 문학적인 네러티브에 기초하기 때문입니다. 동양화는 시(詩)입니다. 나의 작업은 詩를 짓고 그 시를 글씨로 옮기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며 이러한 시와 글씨가 水墨그림이 되고 컴퓨터에 옮겨져서 수묵영상이 되는 것이죠.

Aliceon : 새로운 기술을 활용한 다양한 작업들을 진행하시다 보면, 기존 동양화 작업들과 다른 새로운 고민이 발생할 수도 있다고 보여집니다. 혹시 그러한 부분이 있으셨다면 어떠한 것들인가요?

동양화는 기본적으로 지필묵을 재료로 한다는 양식적 특징의 의미가 있습니다.
또한 문인화의 개념에는 문학에서 말해져온 보여지는 것 이외의 것을 그린다는
상외지상(象外之象, 형상 밖의 표상 - 언제나 생생하게 존재하고 있는 허의 상은 감상하는 독자의 마음속에서는 드러나게 된다. 독자들의 상상력을 고조시켜 시에 묘사된 것보다 훨씬 광대하고 풍부하며 생동적인 그림을 만들어 내도록 하는 것 이것이 상외지상(上外之象)이라고 하였다) 이라는 말에 의미를 둡니다.
이는 앞서 말씀드린 대로 이러한 동양화가 단지 재료로써 만의 문제가 아니라 제게는 정신성을 요구하는 작업에 대한 태도의 문제로 받아들여져 왔습니다.
때문에 처음에 이러한 동양화의 특성이 강한 제 작품을 가지고 기술적 변형을 한다고 생각했을 때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매체로써 동양화(지필묵)과 사진, 그래픽, 영상은 정 반대의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작품으로써의 설득력과 객관성을 갖기 위해서는 늘 둘의 성격을 한 선상위에서 이해하고 비교, 검토, 검증하는 과정이 필요했습니다.
내적이미지와 시각이미지, 무거움과 가벼움, 비움과 욕심, 수렴과 발산, 느림과 빠름,
종적사고와 횡적 사고, 모호함과 정확함, 동양과 서양, 동양화와 현대미술, 같은 것들이
그것입니다. 이러한 작업의 과정은 이제는 제게 있어서 삶을 유추하는 방법이 되었습니다. 그러한 고민의 문제들은 작가로써 뿐만이 아니라 삶을 사는 한 사람으로써 나 자신에 믿음위에서 해결되어왔습니다. 따라서 그러한 고민들이 단지작업을 위한 것뿐만이 아니라 나를 찾아가는 길에 길잡이가 되어 주고 있다는 점에서 고마운 마음입니다.


(2). 상충과 충돌 그리고 모호함과 산재함
앞서 밝힌 바와 같이 본인의 작업은 동양의 전통적 개념인 紙, 筆, 墨과 詩,書,畵 그리고 서화동원(書畵同源)의 개념을 기반으로 한다. 그리고 여기에 본인작업의 분명한 특성을 이루는 동서고금의 문화와 예술, 일상적 삶에 대한 시적 체험에서 비롯된 일상의 습관적인 詩作은 그림과 글씨의 조합으로 나타난다.
여기에는 긴장감이 개입된 충돌과 화해가 존재하며 ‘상충의 미학’을 기반으로 한다.
이 다층적인 충돌은 작업 전면의 적절한 장치와 구조를 통해 해결되고 화해함으로써 홍지윤의 퓨전동양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본인의 작업에서 이러한 상충과 충돌의 결과는 서양의 작가로써 동양적 사고를 문자와 그림을 통해 나타내는 Cy Twombly의 작품의 성격이 그런 것처럼 모호함과 산재함을 낳는다. 2007년 개인전을 위한 작업노트와 전시서문(성윤진, ‘음유 낭만 환상-원효로와 청파동에서 낭만적인 시를 짓고 환상적인 그림을 그리다’) 그리고 본인의 소논문 “Cy Twombly와 본인작품에 나타난 동양적 사고에 대하여 - Roland barthes의 ‘The Wisdom of Art’를 중심으로 2008 ”중 결론부분에 해당하는 다원주의 미술에 있어서 서양인인 톰블리의 작업에서 나타나는 동양의 것과 동양인인 본인의 작업에서 나타나는 서양의 것이 가지고 있는 동양적 사고체계에 있어서 모호함과 산재함이 가지고 있는 가능성의 힘을 논하는 글을 인용하여 이의 이해를 돕도록 하겠다.


상충과 충돌

환.상.변.주.곡

상충相衝의 미학
문자와 그림의 조합은 2005년 개인전 《사계》와 지난 2006년 독일 뮌헨시청갤러리에서 열렸던 《친구 넷 - 사군자》전시에서 그래픽을 이용, 문자와 그림을 오버랩하며 구체적으로 영상화되기 시작한다. ‘문자(단순한 텍스트가 아닌 의미를 지닌 문자)’가 작품 안에 보다 적극적으로 개입된 이번 전시는 시, 서, 화詩書畵 일치의 또 다른 방향을 제시한다. ‘또 다른 방향’이란, 그의 작업이 동양화의 기본이 되는 지, 필, 묵紙筆墨과 시,서,화를 적절히 따르면서도 표현방식으로는 다양한 매체, 즉 형광안료와 천, 라이트박스 등을 혼용하고, 내용은 문학적 서정성을 바탕으로 고도의 은유와 함축의 상징성을 사용함으로써 현대적이면서도 고전적인 이중적 작풍을 취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 얼개처럼 짜여진 구조는 한 매체나 기조가 다른 것에 흡수되는 형국이 아니라 서로의 장점을 취하고 단점을 보완함으로써 퇴진출신(退陣出新_낡은 것을 사라지게하고, 새로운 것이 나타나게 함)의 국면을 본능적으로 시도한다.
작가는 대표적 표현기법들의 대치를 통해 내용을 극대화하는데, 각 기법과 내용은 팽팽한 긴장의 연상선상에서 균형을 잡는다. 즉 글씨와 색, 내용과 이미지를 대치시키거나 매체의 적극적인 활용이 바로 그것이다. 화려한 색동바탕에 먹으로 써 내린 <환상적인 무지개>, <환상적인 세상> 등 환상시리즈나 <좋을 好>,<무지개에게>와 같은 작품은 강렬한 색과 그에 버금가는 문자의 강제성이 충돌하며 증폭된 효과를 만든다. 문자는 그 자체만으로도 보는 이들에게 ‘읽히는’ 강제성을 지닌다. 때문에 문자를 그림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은 매우 매력적이면서도 위험한 시도다. 글자의 강제성으로 인해 여타의 시각적 요소들을 일순간 불식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이러한 위험요소를 형광의, 발광하는 색동과 대치시킴으
로써 양 측에 균형을 부여한다.
이러한 위험은 내용과 이미지 사이에도 일어나는데, 사군자四君子의 소재인 국화나 만개한 꽃, 새의 고전적 이미지를 사용함과 동시에 강렬한 노랑과 분홍, 주황의 형광안료와 가장 극적으로 대치되는 검은 먹을 끌어들임으로써 이미지의 효과를 극대화시킨다. <서쪽하늘의 들국화>나 <꽃 속에 꽃이 핀다>처럼 자칫 이미지를 삼켜버릴 수 있는 텍스트의 강렬한 아우라를 그에 대응하는 형광색동과 만개한 꽃 이미지를 병치시킴으로써 무게중심을 잡은 것이다. 또한 문자를 흘려 씀으로써 가독성(可讀性)을 현저히 떨어뜨리고 마치 문양처럼 처리한 것도 역시 동일한 효과를 가져온다. 기존의 틀을 과감히 깨뜨리고 전통의 굴레를 타파해 나가되, 씨실과 날실의 조화처럼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음은 다층적 층위의 교묘한 장치들을 통해서 동양과 서양을 혼재하되, 매체의 혼합만이 아닌, 이미 그 구분이 모호해진 사상과 화풍의 혼합을 시도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수묵을 바탕으로 음각처럼 그림과 글씨의 윤곽을 파나간 <용서>, <불꽃나무>, <슬픔이여 떠나라> 등은 보다 전통적 동양화의 일면을 보여준다. 수묵을 주조主潮로 작가자신을 형상화한 여인이나 매화, 새를 등장시킨 것이 그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슬픔이여 떠나라’는 브라질 전통가요의 구절을 새기거나 기타를 연주하고 있는 여인, 또는 일견 자애로운 어머니의 모습으로 손을 뻗어 용서를 구하는, 혹은 베푸는 여인의 모습은 수묵이라는 재료가 가질 수 있는 한계를 일순간 깨뜨리며, 그 이상을 누린다.
홍지윤의 작업은 이렇듯 텍스트와 이미지가 상충한다. 또한 먹과 현대의 안료가 상충한다. 종이와 미디어 역시 충돌한다. 이 다층적인 충돌은 작업 전면의 적절한 장치와 구조를 통해 해결되고 화해함으로써 홍지윤의 퓨전동양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시대의 문화적 선구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환상은 어디에
작가는 환상을 시공간과 대유하며 순차적 정의를 내린다.

그것이 지나간 것에 대한 환상(喚想, illusion)이든, 지금 눈앞에 보이는 환상(幻像, phantom)이든, 나도 모르는 새에 일어나는 환상(幻想, fantasy)이든, 실체도 없이 허망하고 덧없는 내일의 환상(幻相, vision)이든.
(홍지윤, 작업노트 중에서, 2007)

이번 전시의 모태가 된 ‘환상’의 인상은 익숙한 일상에서 빈번히 일어나는 감정들을 구체화 한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터무니없지만, 즐거운 상상의 나래는 작가적 상상으로 발전하여 앞서 언급한 다양한 매체와 내용으로 작품에 발현된다. 따뜻한 홍차를 약속한 그녀의 초대(홍지윤의 詩, <초대> 中)를 따라 원효로와 청파동의 골목인상을 반갑게 맞이할 일이다.

서양인에게도 낮선
동양인에게도 낮선
그 간극에서.

초대

맑지도 흐리지도 않은 날
오후 3시 즈음에 이리로 오세요.
뿌연 겨울 해가 따뜻하고요.
그 해가 보이는 창가에는 조용한 새들이 가끔 날아가요.
그리고
바흐의 아리오조를 첼로독주로 들으면요
그 어떤 여행지보다
그 어떤 천국보다
더 천국 같거든요.
바닥엔 너무 깨끗하지 않게 먼지 몇 개 찬찬히 얹혀 져 있고요.
새로 단 표백하지 않은 베이지 빛 광목 커튼이
찬 겨울바람도 막아준답니다.
편안한 의자에 앉았다가
좀 겨를이 나면
따뜻한 홍차도 끓여 드릴께요.
당신이 꼭 이 곳에 왔으면 좋겠어요.


모호함과 산재함

1.
((작업노트 :
홍지윤의 퓨전동양화
음유, 낭만, 환상 - 원효로와 청파동에서 낭만적인 시를 짓고 환상적인 그림을 그리다. 2007 발췌))


2007 “吟 遊 浪 漫 幻 想”
원효로(元曉路)와 청파동(靑坡洞)에서 낭만적인 시를 지어 환상적인 그림을 그리다.

음유吟遊
나는 시를 짓는 일이 좋다.
새벽에 해가 뜨기 전에 짙푸른 하늘을 보면 가끔 맑은 정신이 들어서 똑똑하고 청명한 시를 짓고 여행을 가서는 아름다운 경치 앞에서 가슴이 울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낭만적인 시를 짓고 사랑을 하다가 마음이 아프면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비극적인 시를 짓는다.
그리고 좋아하는 노래를 따라 부르며 노랫말을 내 방식대로 지어보기도 한다.
나와 그 누군가에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즐겁다.

낭만浪漫
그렇게 지은 시를 가지고 글씨를 쓴다.
나에게 글씨는 어렸을 때에 긴 연필심을 뾰족하게 갈아서 매일 일기를 쓰던 기억에서 부터이다. 사춘기와 청춘에는 색칠을 하거나 그림을 그린 편지지에 긴 편지를 써서 친구들에게 보냈었고 좀 시간이 지나 지필묵을 알게 되면서부터는 화선지에 먹으로 글씨를 썼다. 먹이 번지는 순간 마치 누군가가 내손을 빌어 글씨를 쓰는 것 같이 예측하지 않았던 형상과 동시에 자연스럽게 그림이 떠오르는 것이 신비로웠다.
그리고 또 나는 나와는 다르게 머리가 좋은 컴퓨터가 신기하고 재미있다.
좋아하는 음악을 듣는 일도 난 참 좋다.

클래식을 들으면 유럽의 우아한 귀족부인이 된 것 같고 재즈를 들으면 뉴욕밤거리의 여가수나 남미의 정열적인 여인이 된 것 같고 국악을 들으면 멋진 선비가 된 것도 같다.
그래서 시와 글씨와 그림과 음악들을 컴퓨터에 넣어서 움직이는 그림을 만들기도 한다.
이제는 시를 짓고 지필묵으로 글씨를 쓰고 떠오르는 인상에 대한 그림을 그리는 일이
맛있게 생긴 갖가지 잡곡을 골라 맑은 물이 나올 때까지 잘 씻어서 적당한 양의 물을 넣어 알맞은 온도에서 끓여 정성스레 밥을 만들어 먹는 일처럼 일상이 되었다.

환상幻想
작년 여름이 끝날 때쯤에 한참을 지내던 홍대근처에서 우리 동네로 작업실을 옮겨왔다.
우리 집은 원효로(元曉路 :새벽처럼 가장 밝은 길),
그리고 느린 걸음으로 15분가량을 걸으면 청파동(靑坡洞 :푸른 고개가 있는 동네)이다.
이곳에 온 동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건물 4층이 작업실이다.
태어나고 자라온 이 두 동네의 이름이 유독 나는 마음에 들고 모두가 이웃사촌인 오래된 우리 동네가 어머니의 자궁 속이 그랬을 것처럼 편안하다.
시간이 흐르면서 느꼈다.
마음속에 지나가는 잔잔한 바람과 흔들리는 물결과 눈부신 꽃과 나부끼는 나뭇잎을
그 전보다 훨씬 더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지나온 시간들과 지금과 내일에 대한 생각이 잦아졌다.
다른 게 아니라 그저 나를 둘러싼 지나간 그리운 것들,
지금 나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것들, 그리고 보고 싶고, 되고 싶은 것들......
그것이 지나간 것에 대한 환상(喚想-illusion)이든, 지금 눈앞에 보이는 환상(幻像-phantom)이든, 나도 모르는 새에 일어나는 환상(幻想-fantasy)이든,
실체도 없이 허망하고 덧없는 내일의 환상(幻相-vision)이든.
그러나 대신 틱낫한 스님의 말씀처럼 나의 에너지가 내주변의 잔잔한 바람과 흔들리는 물결과 눈부신 꽃과 나부끼는 나뭇잎과 또 그리고 무엇보다 내 주위의 사람들과 사실은 아주 가까운 사이라는 평화롭고도 편안한 믿음과 함께.

구름 위를 걷고 있는 것처럼 현실의 바깥에서 더 자유로운 나는
그전보다 더, 그런 것들을 가슴속에서부터 떠오르는 대로 시를 짓고 글씨를 쓰고 그림으로 그려보고 싶다.
본시 우리의 삶과 현실은 헛되고 헛될 뿐.
다만 미혹한 것들이 잠시 요술을 부려 살아가는 잠시 동안 덤덤한 허깨비를 보게 할 뿐.

갑자기 봄날이 온 것 같았던 따스하던 며칠 전에
동네 한 바퀴를 돌며 “아름다운 철죽이 이천 원이요, 이천 원이요” 하던 꽃장수 아저씨에게
뛰듯이 달려 나가 사온 푸르기만 하던 철죽 화분 두개에 오늘 분홍 꽃이 활짝 피었다.

정말 환상적이다.

2007년 3월25일 청파동에서 홍지윤,

2.
Cy Twombly는 서양에서 동양을 보았다.
그의 예술은 흔적 /억제 / 무기력한 태도/ 흔들리는 얼룩/ 습관의 조합, 배열, 분포
내던짐 / 희박함Rare / 간격 /미로 / 고전 / 지중해 / 비어 있는 진리 / 서투름
어색함 / 도(道) / 흔적들의 분산 / 우둔함 / 산재 등의 단어로 말할 수 있다.
이들 대부분의 단어의 의미들은 기존의 서양 작가들에게서는 볼 수 없는 회화적 성공에 대한 부정적 의미이지만 그는 결국 성공을 이루었다.

그의 그림은 또한 그림문자처럼 기능하며 의미의 갈증을 느끼고 있는 사람들에게 미끼를 던지며 미로의 기능을 가진다. 이는 매우 지적이며 매우 감각적인 희귀한 방식이다.
그리고 톰블리의 그림들이 만들어내는 것은 매우 단순하다.
그리고 직관적이다. ‘효과’는 시에 의해서 암시되는 일반적인 인상, 육감적이며 가장 시각적인 인상이다. 그것은 인상(메세지)의 깨어지지 않는 통일성과 그것의 원인들이나 요소들의 복합성이라는 역설에 의해 정의된 감각의 진정한 범주이다.
톰블리의 예술은 폭력의 예술이상으로 동요의 예술이며, 그리고 동요는 폭력보다도 더 전복적인 경우가 많다. 바로 그것이 행동과 사고에 대한 어떤 동양적 양상의 교훈인 것이다. 또한 그의 예술은 역설적이며, 그 안의 간결함이 장엄하지 않다는 점에서 매우 도발적이기까지 하다. 일반적으로 간결한 것은 압축된 것처럼 보인다. 희박성은 밀도를 낳고 , 밀도는 수수께끼를 낳는다. 톰블리에게 있어서는 또 다른 발전이 일어난다.
확실히 침묵, 혹은 좀 더 정확히 말해서 매우 아련한 그 표면의 지글거림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바탕은 그 자체로 하나의 적극적인 힘이다.
톰블리의 예술은 그 어떤 것도 포착하지 않는다. 그는 미묘하게 손을 움직이는 욕망과
매혹적인 야망을 신중히 거부하는 정중함 사이에서 위치하며 부유하고 표류한다.
만일 우리가 이같은 윤리를 정착시키기를 원한다면 아주 멀리 회화의 바깥, 서양의 바깥, 역사의 바깥에서, 의미의 한계 자체에서만 오직 찾아야 할 것이다.
여기에 톰블리의 윤리, 그의 위대한 역사적 독특함이 있다.

롤랑바르트가 톰블리의 작품에서 동양을 말하듯 본인의 작업에서도 서양을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의 작업에서 작품과 내면은 동양의 것을 보여주지만 그것은 연필과 서양재료로써 표현된다. 이는 재료의 제한성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태생적으로 그는 서양인이다. 마찬가지로 본인의 작업 또한 서구적인 미디어와 다양한 매체를 사용하지만 작업의 주체인 본인은 동양인이다. 다원주의 시회에서 이제 미술은 국적과 지역을 넘어 모든 것이 가능하게 되었지만 그 작가가 가지고 있는 내면의 사고체계의 기반은 삶의 방식과 그것이 비롯된 문화와 유리될 수 없다. 이 말은 표현기법과 재료와 사고방식의 자유로움이 가능하다고 해서 모든 것을 완전하게 넘나들 수는 없다는 의미이다.
톰블리의 작품에서 동양적 사고는 뚜렷하게 나타나지만 이 역시 지중해를 주변으로 하는 자연의 풍광과 서양인으로써의 그의 시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본인 또한 작업에 나타나는 미디어나 서구의 도구를 사용했다고 해서 한강유역에서 태어나 살아가는 동양인으로써의 사고의 범주와 작업의 표현을 크게 넘어서지는 못하는 것이다.
이는 두 가지의 함의를 갖게 한다. 하나는 시공을 벗어난 폭넓은 사고를 보게 한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작가로서의 태생적 정체성에 대한 의문이다.
이는 부정적인 견해라고는 볼 수는 없다. 폭넓게 발전하는 예술의 범주안에서
톰블리의 작업이 동양적 사고의 차용을 가능하게 했듯이 해법을 달리할 뿐 본인의 작업도 또한 서양적 사고의 차용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물론 본인이 말하려고 하는 것은 예술의 현상이 아니라 예술가의 근본적인
사고체계에 대한 이야기이다. 롤랑바르트가 톰블리의 동양적 사고체계에 붙여
예술의 지혜라고 했다면 본인의 작업에서 추구해야 하는 진정한 예술의 지혜란 무엇일까.
본인은 시공간에 포함된 작가가 살아가는 삶의 정체성에 대해 관심을 둔다.
동양이든 서양이든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만 살아가고 있는 바로 그곳에서 바로 그곳다운 삶의 정서가 작가적 사고에 발현되어 바로 그 작가다운 작업이 현재의 작품에 나타나게 된다면 그것으로 족할 것 같다. 본인의 작업은 성윤진의 말대로 서양인에게도 낮선, 동양인에게도 낮선 그 간극일 것이며 그리고 또한 시각적인의미로서가 아니라 사고의 의미로서 롤랑바르트의 말대로 톰블리의 작업에 나타난 모호함과도 유사할 수 있을 것이다. 모호함 안에는 얼마나 많은 가능성이 존재하는가.
본인은 그 모호함 안에서 그것이 상충이 되었든 퓨전이 되었든 아직은 완성되지 않은 즐거운 가능성을 기대하며 작가적 정체성에 어울리는 자유롭고 건강한 작업을 지속하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롤랑바르트가 톰블리의 예술의 지혜에 관해 언급한 바를 축약 하여 적어본다.
“ 톰블리의 예술은 그 어떤 것도 포착하지 않는다. 그는 미묘하게 손을 움직이는 욕망과
매혹적인 야망을 신중히 거부하는 정중함 사이에서 위치하며 부유하고 표류한다.
만일 우리가 이 같은 윤리를 정착시키기를 원한다면
아주 멀리 회화의 바깥, 서양의 바깥, 역사의 바깥에서 , 의미의 한계 자체에서만 오직 찾아야 할 것이다. 여기에 톰블리의 윤리, 그의 위대한 역사적 독특함이 있다.


도덕경을 통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는 아무것도 빌리지 않고서도 만들어 내며
그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고서도 행동하며
자신의 작품이 완성되더라도 거기에 집착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거기에 집착하지 않는 까닭에
그의 작품은 남을 것이다.





2) 아서 단토의 미술종말론의 개요


1. 미술의 종말과 그 이후의 미술 :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시기
아서단토의 종말론은 오늘날의 미술상황을 비로소 자기 자신을 인식하고 자기 자리를 찾은 시기라는 의미에서 미술의 종말 이후의 시기로 보고 있다.
특정한 내적인 방향이 없는 자유로운 시기라는 의미에서 다원주의적 시기라고 규정하고 있다. 오늘날에는 무엇이든지 미술이 될 수 있다는 것이 미술의 종말 이후의 미술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라고 보고 있다. 무엇이든지 미술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위기가 아니라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던 미술의 정체성(identity)에 대한 문제를 올바르게 제기 해 주고 그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 해 줄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워홀로 대표되는 팝아트의 등장이 예술작품의 올바른 정체성을 파악하게 만들었고 동시에 미술의 종말을 인식하게 만들었다.
미술이 끝났다는 단토의 종말론은 그의 고유한 철학적 입장을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동시에 서구 미술의 객관적인 역사적 구조에 근거를 둔 경험적 주장이다.
2. 팝아트가 지닌 첫 번째 함의 : 지각적 식별불가능성과 의미의 구현
두 개의 식별 불가능한 사물이 주어졌을 때 하나는 예술이고 다른 하나는 예술이 아니라면 무엇이 그 차이를 설명 해주는가? 이 질문이 서구의 미술의 역사 속에 서 제기 되었을 때 미술이 종말을 고했다고 단토는 주장하고 있다.

미술의 종말을 주장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던 사건은 1964년 4월 맨헤튼의 74가의 스테이즐 화랑(Stable gallery)에서 열린 앤디 워홀Andy Warhol의 <브릴로 상자brillo Box>의 전시회에서 이다. 이 작품의 등장이 오늘날 예술작품으로 보일 수 있는 특별한 방식이 존재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인식하게 만들었다. 이로써 눈으로 지각할 수 있는 특징으로는 더 이상 예술의 지위, 동일성, 특질의 문제를 확인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고 동시에 이제까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예술의 본잘을 파악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 해 주었다. 워홀의 <브릴로 상자>는 오늘날 일상의 사물과 눈으로 식별 불가능한 예술작품이 원리적으로 있을 수 있고, 예술작품이 될 수 있는 특별한 방식이 존재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인식하게 만들었다. 이 사건은 무엇이든 예술작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고 동시에 미술의 종말을 야기 하는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다고 단토는 보고 있다.

단토의 예술철학서인 <일상적인 것의 변용>에서는 어떤 일정한 범위에서 서로 닮은꼴의 두 일상적인 사물이 주어졌을 때, 무엇이 예술작품인가의 차이를 설명 해 주는가하는 것을 말한다. 그는 이 문제를 예술철학의 중요한 과제로 삼았고 그의 예술 정의의 핵심은 워홀의 <브릴로 상자>와 눈으로 식별 불가능한 일상의 브릴로 상자 가 구별된다는 것이다.
예술이 되기 위한 두 가지 조건은 예술작품은 항상 어떤 것에 관한 것 (aboutness)이고,
내용과 의미를 가지고 이어야 한다는 것과 어떤 것이 예술이 되기 위해서는 의미를 구현 하고 있어야 한다느 것이다. 둘 사이의 차이를 만들어 주는 성질인 “무엇에 관함”을
찾아낼 수 있다면 두 대상은 존재론적 차이점을 지니게 된다고 주장한다.

예술작품은 그 주제에 관한 것뿐만이 아니라 작가가 그 주제에 관련하여 무언가를 전달하기 위해 그에 적절한 매체와 방식을 찾는다고 할 수 있다. 현대 미술가들은 매체를 특별한 효과를 산출하기 위한 수단으로 인식하게 시작했다. 세잔, 고흐. 고갱에서부터 시작 되었다. 붓질은 이들에게 있어서 매체를 특별한 효과를 산출하기위한 수단이 되었다.

3. 팝아트가 지닌 두 번째 함의 : 미술에 대한 믿음체계의 변화와 내러티브의 종말
단토는 <브릴로상자>등의 등장을 통해 1960년대 이후에 와서는 그 이전의 시기와 다른 믿음체계, 즉 어떤 대상이든 예술작품으로 될 수 있다는 믿음체계가 형성되어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브릴로 상자>의 등장은 오직 1960년대 맨하튼의 하늘아래에서만 그것은 예술작품이 된다는 것이다. 이 사건은 각 시대마다 각기 다른 ‘미술’ 개념 혹은 미술에 대한 믿음 체계가 있다는 것을 의식하게 만들었다.

단토는 이의 설명을 위해 <예술계artworld>즉 , 한 대상을 예술작품으로 식별하기 위해서는 눈으로 볼 수없는 그 무엇, 곧 미술사의 지식과 이론에 해당하는 , 예술계라는 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한 예술작품이 예술인지 아닌지 알기위해서는 눈으로 확인할 수 없고 그 당시의 미술상황에 대한 지식과 더불어 당시의 미술에 대한 믿음체계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단토는 각 시대마다 다른 미술에 대한 믿음 체계에 대한 변화를 미술의 내러티브로 설명한다. 단토가 미술의 종말을 선언할 때 가장 핵심이 되는 의미는 미술의 내러티브가 끝났다는 것이다. 서구의 고유한 미술에 대한 믿음 체계가 있고, 그 미술에 대한 믿음의 내러티브가 끝났다는 것이다.
단토는 미술에 대한 믿음체계가 어떻게 이어져 내려왔는가를 살명하기 위해 미술에 대한 거대한 내러티브를 구성한다. 하나는 바자리의 에피소드이고 다른 하나는 그린버그의 에피소드이다. 단토는 두 가지 모두 진보적인 것으로 본다. 전통적인 바자리의 재현미술의 에피소드가 르네상스에서 시작해서 인상주의에 이르기 까지 지속되었다고 설명하며 뒤이은 그린버그의 에피소드는 전통적인 회화에서 모더니즘의 변화에는 동영상의 등장과 기존의 문화적 신념의 상실로 설명한다. 외관의 정복이 미술의 유일한 목표일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됨으로써 르네상스로부터 인상주의에 이르기까지 이어져 내려오던 미술에 대한 믿음체계가 변화를 가져오게 되고 전통적인 재현미술의 이야기인 바자리의 내러티브는 끝나고 모더니즘 내러티브가 시작된다고 단토는 설명한다.

모더니즘이 대표적인 내러티브는 그린버그의 에피소드이다. 그린버그는 다른 미술과의 구분과 물질적인 조건 속에서 모더니즘의 해답을 찾았고 자기만의 양식을 갖는 것에 예술의 진정성을 두어 자신만의 양식의 제시와 수많은 선언문들이 특정한 종류의 양식만을 확정해서 이것만이 유일하게 중요한 예술이라고 선언한다.

단토는 팝아트의 등장으로 내러티브가 끝났다고 보고 있다.
팝아트의 등장을 통해서 “단순한 실제 사물”과 미술이 지각적 측면에서는 차이가 없다는 것을 의식하게 되고, 무엇이든지 미술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분명 해 졌기 때문이다.
이때 비로소 미술에 관한 진정한 철학적 자기반성이 가능 해 지게 되었다.
미술작품이 어떠해야 한다는 특수한 상식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
하였을 때 미술의 내러티브는 종말에 이르렀다고 단토는 보고 있다.

모든 것은 예술작품이고 누구나 예술가 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어떤 목적으로든 목적 없이 자유롭든 모든 것이 미술이 되었고 이것이 역사-이후의 미술의 상황이다.
오늘날이 실제로 예술의 종말 상태이다. 미술의 과업 또는 어떻게 그것을 작품으로 제시 할 것인가 고민 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에서 그것을 고민했던 그 미술의 종말을 주장하는 것이다. 오늘날은 새로운 미술의 시대로 나아가는 중간단계가 아니다.

4. 다원주의 미술의 시대 : 배타적인 미술의 종말과 미술의 역할의 변화
이제 미술사의 특별한 방향도 없다는 의미에서 그리고 어떠한 양식도 동등한 권리이상을 요구 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단토는 오늘날의 미술상황을 다원주의 시기라고 특징짓고 있다. 미술이라고 생각하는 것으로부터 미술이 아닌 것을 분리 해 내는 ‘자격박탈’의 역사(History of Disenfranchisement) 는 종말을 고했다.
미술의종말의 시대가 지닌 가장 중요한 함의는 모더니즘 시기에는 미술의 역사밖에 놓여 있던 다양한 목표와 가치를 지니고 있던 작품들에게 미술이 자격을 수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미술종말론은 철학일반, 혹은 그의 철학 일반에서 논리적으로 도출된 이론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서구뿐만이 아니라 아프리카 동양의 미술 더 나아가 다른 장르의 미술도 종말을 고해야 한다.
그의 예술철학과는 달리 미술종말론은 특정 지역의 미술에 대한 믿음체계의 변화라는 역사적 혹은 경험적 사실이 개입되어있다.

단토의 예술철학은 재현적 성질을 지닌 대상으로서 예술작품의 특성을 분석한 이론이고
그의 예술종말론은 서구의 미술에 대한 믿음 체계의 변화를 내러티브로 구성한 이론이다.
그의 에술철학에서 주장하는 것은 보편적 예술의 정의이고 예술종말론에서 주장하는 것은 특정 시기의 미술, 즉 서구의미 술에 대한 믿음체계의 변화라는 경험적 혹은 역사적 주장을 담고 있는 것이고 이에 따라서 후자의 타당성은 그 시대의 역사적 사실과 일치하느냐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미술의 내러티브가 끝났다는 주장은 그의 철학적 기본 전제에서 귀결되는 논리적 주장이 아니라 서구의 미술의 믿음 쳬계의 변화에서 이끌어 낸 경험적 주장이다. 이 주장이 타당한가의 문제는 역사의 내러티브와 미술 상황의 일치의 문제이다.

서구에서는 르네상스이후 미술에 관한한 특별한 믿음을 지니고 있다.
그러한 믿음을 보장 해 주는 개념으로써 ‘예술fine art'라는 개념이 발생했고, 이 개념이 등장한 이래 적어도 시각예술, 즉 미술은 다른 시각 이미지들과는 다른 특별한 성질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믿음을 지니고 있다고 보는 것이 설득력이 있다.

최소한 미술(예술)이라고 칭해지는 시각 이미지는 나머지 것과 달라야 한다는 믿음만은 공유하고 있다는 보는 것이 합당하다고 판단된다.

다원주의시대의 비평은 하나의 양식을 옹호 하는 형식의 비평이 아니라
사용한 이미지가 무엇을 지시하는지 그리고 작가가 무엇(어떤 주제)를 나타내려고
그 양식(제시 방식)을 이용하는지 추론하는 형태가 될 것이다.
다원주의 비평은 그 자체로는 중립적인 형식으로 구성된 이미지에 대해 그 양식의 채택의 이유를 추론하고 그 의미를 채워가는 형태가 될 것이다.

그리고 다원주의 시대의 평가는 한 작품이 다양한 목표중에서 어떤 목표를 추구하는지
밝혀내고 그 목표를 완성하기위해 사용한 양식이 적절한 것인지 확인하는 방식으로 진행될 것이다.



3. 결론

변화하던 미술의 역사적 내러